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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5 정전 사태 이후 지하철역 등 공공시설 곳곳에는 '전력위기'를 내세워 에어컨 끄기 등 절전운동 동참을 호소하는 안내문이 붙고 있다.
 9.15 정전 사태 이후 지하철역 등 공공시설 곳곳에는 '전력위기'를 내세워 에어컨 끄기 등 절전운동 동참을 호소하는 안내문이 붙고 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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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청와대 에어컨은 장식품?

"지금 너무 더우시죠." 지난 6월 18일 페이스북 최고경영자인 마크 주커버그가 청와대를 찾았다 진땀을 뺐다. 청와대에서는 평소 더운 날씨에도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는데 모처럼 정장으로 격식까지 갖춘 탓이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건넨 말도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다.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절전을 몸소 실천하는 대통령이라는 칭찬과 굳이 외국 손님들 앞에서까지 '전력난'을 과시할 필요가 있느냐는 비판이 엇갈렸다.

[장면#2] 사상 초유의 정전 대비 훈련 

지난해 6월 21일 오후 2시 요란한 사이렌이 '여름철 정전 대비 훈련'을 알렸다. 공공기관은 모두 전원을 내렸고 민간에서도 '자발적 절전'에 동참했다. 정부는 이날 20분 동안 원전 5기에 해당하는 500만kW 이상을 아꼈다고 밝혔지만 대부분 산업시설 협조 덕이었다. 딱 한 번뿐이라던 이날 훈련도 지난 1월 10일 '겨울철 정전 대비 훈련'으로 이어졌다. (관련기사: 20분간 전국 정전 훈련했더니... 그 결과는? )

대한민국은 '절전 열풍'...온 국민 절전해야 '전력위기' 극복?

"갑작스러운 무더위에 예비전력 부족... 전력수급 '관심' 경보 발령!"

대한민국은 '절전 열풍'이 한창이다. 날씨가 좀 덥다 싶으면 어김없이 전력수급 경보가 발령되고 여기저기서 에어컨을 끄라는 압박이 시작된다. 청와대뿐 아니라 모든 관공서는 한여름에도 실내온도 28도 이상을 유지해야 하고 피크시간대엔 아예 에어컨을 꺼야 한다. 학교에선 학생들 탈진을 우려할 정도고 도심 상가에선 '개문 영업 단속'을 놓고 실랑이가 벌어진다. 지난 2011년 9.15 순환정전사태 이후 벌어진 진풍경이다. 

과연 예비전력이 부족하면 '블랙아웃'(광역정전) 사태가 벌어질까? 국민들이 에어컨을 끄면 전력대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일부 학자들과 시민단체는 이런 '절전 열풍'에 근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공연히 국민적 불안감을 부추겨 전기요금을 올리거나 원전 비리 같은 '전력산업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꼼수'라는 것이다. 

실제 그동안 '전력 위기 열풍'은 각종 원전 비리에 대한 국민 불만을 잠재우는 데 특효약이었다. 지난해 3월 정전 사고 은폐 사건으로 고리 1호기 가동이 중단된 뒤 전국적인 정전 대비 훈련이 진행됐고, 고리 1호기를 재가동하기로 한 지난해 8월 6일엔 공교롭게 예비력이 200만kW대로 떨어지며 9·15 이후 처음 전력수급 '주의' 경보가 발령됐다.

2011년 9.15 정전 사태 이후 최대전력수급 및 예비력 변화 추이. 원전 비리로 원전 가동이 중단될 때마다 전력수급 경보가 발령돼 '전력 위기' 우려를 증폭시켰다.
 2011년 9.15 정전 사태 이후 최대전력수급 및 예비력 변화 추이. 원전 비리로 원전 가동이 중단될 때마다 전력수급 경보가 발령돼 '전력 위기' 우려를 증폭시켰다.
ⓒ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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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원전 부품 위조 사건으로 영광 5, 6호기 가동 중단 이후에도 겨울 한파로 '주의' 경보가 우려됐지만 다행히 '관심' 단계에 멈췄다. 지난 5월 28일 새한TEP 시험성적서 위조 사건으로 원전 2기 가동이 중단된 뒤에는 때 이른 더위가 찾아왔고 정부는 '8월 전력 위기설'에 불을 지피고 있다.

하지만 막상 지난 2년 사이 숱한 사건에도 우리 전력계통에 '심각'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흔히 여름철 폭염이나 겨울 한파에 냉난방기 사용이 몰리면 전력수요가 급증하고, 예비력이 부족하면 전력수급 경보가 발령된다. 한국전력거래소는 매시간 예비력이 500만kW 밑으로 떨어지면 '준비' 경보를 발령하고, 400만kW 미만은 '관심', 300만kW 미만은 '주의', 200만kW 미만은 '경계' 단계로 격상한다. 예비력이 100만kW 밑으로 떨어지면 '심각' 경보를 발령하고 블랙아웃에 대비해 일부 지역이나 산업단지 전기 공급을 차단하는 계획 정전을 실시한다.

9·15사태 당시 예비전력이 24만kW까지 떨어져 '블랙아웃' 직전까지 간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후 예비력이 200만kW 밑으로 떨어진 적은 없었다. 그동안 '준비'나 '관심' 경보는 60여 차례 발령됐지만 '주의'는 지난해 8월 6일(289만kW) 단 한 차례에 그쳤다.

전력거래소 예비력 관리 '주먹구구'... "블랙아웃 공포는 '대국민 사기극'"

9·15 사태 원인에도 의견이 갈린다. 정부와 전력거래소는 당시 때늦은 늦더위에 전력수요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면 예비력 확보를 강조하고 있는 반면, 국회와 일부 학자들은 전력 IT 시스템 핵심인 전력계통제어시스템(EMS) 관리 부실이 한몫했다고 지적해왔다.

EMS란 전국 300여 개 발전기 상태를 추정하는 한편 발전기 고장이나 송전선 차단 같은 상정고장을 감안해 연료비를 최적화할 수 있는 '경제급전'을 돕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전정희 민주당 의원은 전력거래소가 EMS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매년 연료비 수천 억 원을 낭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비력을 정확히 계산하지 못해 대규모 정전사고 위험을 자초해 왔다고 지적했다.

7월 23일 과천정부청사 방문자센터에 마련된 전력수급현황 화면. 이날 오전 11시 30분 현재 비가 많이 내려 전력 수급이 '정상'인 상태에서 실내온도 27도를 유지하고 있다.
 7월 23일 과천정부청사 방문자센터에 마련된 전력수급현황 화면. 이날 오전 11시 30분 현재 비가 많이 내려 전력 수급이 '정상'인 상태에서 실내온도 27도를 유지하고 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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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국회에서 열린 EMS 기술조사 보고대회에서도 전력거래소의 주먹구구식 예비력 계산이 도마에 올랐다. 대외 발표용 예비력(공급예비력)과 내부용 예비력(송전단 예비력) 수치가 달랐던 것이다. 정부는 정확성을 높이려고 '발전단 예비력'에서 발전소 자체 전력 사용량을 뺀 '송전단 예비력'을 따로 계산한다고 밝혔지만 조사위원들은 예비력이 2개 이상 존재하면 예비력 계산에 혼란을 줄 수 있다며 개선을 요구했다. 또 일부 위원들은 예비력이 EMS 예비력관리프로그램(RMS)를 통해 정확히 산출되지 않는 증거라며 거듭 의혹을 제기했다.

전력거래소 전무를 지낸 김영창 아주대 에너지학과 교수는 400여 쪽짜리 현장 조사 보고서에서 "전력거래소는 EMS를 사용하지 않고 있고 전력거래소 중앙급전실에서 발표하는 예비력 등 대부분 수치는 신뢰성 없는 허수"라고 지적했다. 

전정희 의원 역시 "지금 전광판에 올라오는 예비력은 실제 EMS에서 계산한 운영예비력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 없는 대외용 숫자일 뿐"이라면서 "예비력 논리로 블랙아웃 공포감을 조성해 전기요금 인상을 압박하고 발전사들을 먹여 살리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비력이란 가동할 수 있는 발전기 최대공급능력에서 전력수요를 뺀 것으로, 발전기 고장이나 수요예측 오차, 급격한 수급 변동에 대비한 것이다. 현재 전력거래소 '전력시장운영규칙'에는 예비력을 400만kW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국회는 EMS를 제대로 가동하면 150~250만kW으로 낮출 수 있어 연료비를 줄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영창 교수는 "전력수급 경보도 전력계통 사업자들을 위해 내부용으로 만든 것"이라면서 "예비력이 부족해 심각 단계에 이르면 급전운영지침을 만들어 자체적으로 해소하면 되는데 국민들에게 미리 알려 '블랙아웃' 공포감까지 조성하는 건 일종의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꼬집었다.

실제 지난해 6월 정전 훈련 당시에도 정부는 20분 동안 548만kW를 아꼈다고 밝혔지만 산업체 기여도가 71%에 달했고 기업체 등 일반건물이 25%로 뒤를 이었다. 정작 교육기관이나 공공부문, 주택부문 절전 기여도는 5%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난해 6월 21일 오후 2시 서울 삼성동 전력거래소 모의 전력관제센터에서 정전 대비 위기대응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6월 21일 오후 2시 서울 삼성동 전력거래소 모의 전력관제센터에서 정전 대비 위기대응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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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희 의원은 "정부는 발전기 1~2기만 고장 나도 블랙아웃이 일어날 것처럼 하지만 실제 예비력은 단 1kW만 남아 있어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송전선 감시를 제대로 안 하면 블랙아웃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도 제대로 대비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역시 "EMS 논쟁에서 전문가들 사이에도 찬반이 갈리고 있지만 타당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한다"면서 "정부가 여름철 예비력 부족을 내세워 국민 불안감을 조성하고 추가 원전이 필요하다는 빌미로 삼고 있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에 김헌태 산업통상자원부 전력산업과 사무관은 "전력수급 경보가 국민에게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경보 없이) 급작스런 정전사고가 발생하면 제대로 대응 못해 국민들이 더 놀랄 수 있다"면서 "사고가 언제 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국민들이 (전력난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아울러 EMS 문제 지적에 대해서도 "EMS 기술조사 결과 다수 위원들은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문제가 있다는 건 소수의견이었다"면서 "일부 개선 요구 사항은 타당성 검토가 필요해 전력거래소와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태그:#전력거래소, #전력위기, #EMS, #블랙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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