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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30년 후에도 민주주의 일깨우는 박종철 열사

송고시간2017-01-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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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오늘, 민주주의를 외치다 떠난 청년 - 박종철 열사 30주기, 당신을 기억합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한 청년이 쓰러졌습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죠.

청년의 이름은 박종철.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생이었습니다. 경찰은 그가 조사를 받다가 '쇼크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 믿기 어려운 사망 원인. 첫 보도는 수사관의 가혹 행위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부검 결과 고문의 흔적도 역력했죠.

양심 있는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의 의혹 제기로 그 내막이 서서히 드러났습니다. 경찰은 사건 발생 5일 만에 물고문이 있었다고 시인했죠. 수사관 두 명이 구속되고, 진실은 그렇게 밝혀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청년의 죽음에 또 다른 비밀을 폭로했습니다. 경찰이 박종철에게 10시간 동안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한 것도 모자라, 공안당국이 조직적으로 사실을 은폐했다는 것입니다.

참혹한 고문 끝에 꿈 많은 청년이 숨진 사실은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기 충분했습니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고문 추방을 외쳤고, 행진은 6월까지 이어졌습니다.

'6·10 항쟁'을 하루 앞둔 날, 연세대 앞에서 이한열 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끝내 숨졌습니다. 두 청년의 잇따른 죽음은 6월 민주항쟁의 불을 댕겼습니다.

전국 33개 도시에서 100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을 타도하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한 온 국민의 열망이었습니다.

결국, 국민의 힘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실현됐습니다. 대한민국은 군부정권이던 5공화국을 뒤로하고 6공화국을 열었습니다.

시민이 흘린 피로 실현된 6월의 민주주의. 이 모든 것의 시작에는 박종철 열사가 있었습니다.

청년의 죽음으로부터 30년이 지났습니다. 국민의 마음에 민주주의의 열망을 싹 틔운 박종철 열사,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인물이 아닐까요?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연합뉴스) 한혜원 기자·정현희 작가

hye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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