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차] '차명진 황제 식사' 따라해 보려 했더니..

장일호 입력 2010. 7. 29. 12:03 수정 2022. 1. 21.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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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윤무영 의료봉사단이 장수마을을 찾아 어르신들을 진찰했다.

역시 무리였다. ‘차명진 황제 식사’를 따라 해보려 발품을 팔았다. 마을 부근 마트 두 군데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970원 짜리 미트볼·참치·쌀국수는 찾을 수가 없었다. 차 의원이 애용한 서울역 L마트까지 가자니 교통비가 더 들어 결국 포기했다. 고등어자반이나 한 손 사서 들어가려 했는데, 가격이 8,000원이나 했다. 비싸서 망설이고 있으니 아저씨가 시들시들한 자반 한 손을 가리키며 5,000원에 가져가라고 말했다. 더운 날씨에 진이 빠져 양파와 마늘, 참치만 사서 덜렁덜렁 들고 시장을 나섰다.

시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고 높은 길. 뜨거운 불 앞에서 음식 만들 생각하니 진저리가 났다. 하루 종일 지역면접조사를 다니느라 정신도 지친 상태였다. 단순 가계부 설문조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면접조사는 한 가구당 2~3시간 가까이 이뤄지기 일쑤다. 그들의 내밀한 사정을 듣고 있다 보면 온 몸의 기운이 ‘쫙쫙’ 빠진다. 한 번의 실패가 돌이킬 수 없는 빈곤으로 이어지는 나라. 룸메이트 소영씨가 물었다. “실패하면 이렇게 가난해지는 건가요? 무서워요…”

오늘 면접조사를 한 가구에서는 지역의료보험료가 재산에 비해 너무 많이 나와 체험단들이 ‘해결사’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다. 가진 재산이라고는 고작 전세금 1천3백만원이 전부인 집에서 84세 할머니의 의료보험료가 매달 11,000원이나 나왔다. 할머니 역시 부양의무자 기준에 걸려 기초생활수급대상자에서 제외됐다. 의료보험료는 할머니 사정에서는 너무 큰 돈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지서에 나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 이런 저런 할머니의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래 지역의료보험료 책정은 재산 기준으로 이뤄지는 데, 개인이 따로 전세계약서 따위 증명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이른바 ‘평균 시세’에 의해서 의료보험료가 책정 된단다. 전세 1천3백만원에 사는 할머니의 의료보험료는 이 지역 평균 전세값에 의해 3천만원으로 책정 돼 있었다고 했다. 여러 차례 ARS 안내를 거쳐 연결 된 수화기 너머 친절한 목소리는, 전세계약서를 복사해 ‘지역보험료 조정건’이라고 적어 팩스로 보내면 끝이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너무 간단한 일이었지만 84세 독거노인은 ARS 안내가 뭔지, 팩스가 뭔지 알 턱이 없다. 아마 이 마을 어른들 대개가 이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런 이야기를 소영씨와 두런두런 나누며 시장을 지나다가 계획에도 없던 ‘외식’을 결정했다. 둘 다 밥 해먹기 지쳤던 탓이다. 막창 1인분에 6,000원. 둘이 앉아 1인분만 먹기가 죄송스러워 고민하다가 메뉴 중 가장 싼 3,000원 짜리 해물전을 추가로 시켰다. 1인분만 시키는 ‘철판’을 깔기에 가게는 너무 허름했고, 손님도 우리밖에 없었다. 해물이라고 해봤자 부추 조금과 오징어 두세 개 들어간 게 전부인 밀가루 전이었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 싶어 남김없이 먹었다. 

ⓒ시사IN 윤무영

죄짓는 것 같았던 외식을 반성하며 돌아오는 길에 ‘과감한’ 지출이 한 번 더 이뤄졌다. 소영씨랑 속옷을 하나씩 샀다. 그래도 ‘숙녀’라고 속옷을 바깥에 널 수 없어 손으로 조물조물 빨아 방 안에 널어 두는데, 요즘 습한 탓인지 잘 마르지 않았다. 세탁기 탈수 기능은 망가진 지 오래다. 여름이라 매일 갈아입다 보니 어쩌다 하루라도 빨래가 밀리는 날은 정말 난감하다. 게다가 둘 다 어김없이 돌아온 ‘빨간 날’. 가지고 들어온 속옷 5장으로는 어림도 없다.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귀여운 순면 속옷 한 장에 2,000원. 최저생계비 계측 가격보다 무려 1,200원이나 싸게 샀다. 가계부를 작성하며 계측 목록을 뒤져 보던 소영씨는 “언니, 우리 이거 3년 입어야 해요”라고 말하면서 깔깔 웃었다(‘최저 피복·신발비 마켓 바스켓 : 중생보위 의결안 기준’에 따르면 여성 팬티 한 장은 3,236원이며 3년간 입어야 한다).

집에 돌아와 더위 먹은 개처럼 혓바닥 내밀고 방에 퍼져 있는데, 옆집 할머니가 방문을 두드린다. 할머니는 “헥헥 대며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라며 얼음 동동 띄운 미숫가루를 한 사발 건넸다. 할머니는 “간간히 방 안에서 들리는 젊은 사람 웃음소리가 너무 밝아서 좋다”라고 말했다. 방음이라고는 전혀 안 돼 ‘사생활’이 불가능한 주거 환경을 내가 내내 스트레스로 여겼던 것과 달리, 할머니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마을에서 참 많은 것을 받았다. 길가다 엉겁결에 받아먹었던 찐 옥수수, 막 담근 김치, 길가 텃밭의 방울토마토 등. 이런 호의는 감히 돈으로 계산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가계부에 적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나눠 드릴 사탕 따위 주전부리를 잔뜩 샀다. 마음은 신났지만, 가계부를 보니 ‘파산’할 게 너무나 분명해졌다. 아직 전기세·수도세·핸드폰 요금 따위 세금 계산은 시작도 안 했다. 이럴 때 한 달 체험하는 게 아니라 실제 삶을 사는 사람들은 ‘공과금 연체’란 방법을 선택하겠구나 싶었다.

이틀이 지나면 최저 생계비 한 달 나기 체험은 끝난다. 현재 체험단 5가구 모두 너도나도 ‘파산’을 선언했다. 파산을 선언한 1인 가구 안성호씨는 오늘 로또복권 5,000원 어치를 구매했다. “예전에 뉴스를 보니까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떤 사람이 목을 매고 자살을 했더라고. 그 방 안에 로또 복권 수백 장이 있었데. 아까 쪽방촌 갔다가 돌아오는데 그 뉴스가 생각났어. 왠지 그 마음이 이해가 되더라고.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지출이라는 거 알면서도, 샀어.”


양파 1,500원/참치 3,000원/마늘 1,460원/물 850원/사탕·과자(마을 어른 선물용) 15,000원/ 곱창+해물전(외식) 9,000원/속옷 4,000원/담배 2,500원/생리대 3,000원

금일 지출 40,310원 누적 지출 770,450원 잔액 88,300원

 

 

장일호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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